[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전과 말모이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전과 말모이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3-사전과 말모이’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4.02.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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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램프의 영화 '말모이' 포스터. 사진=네이버캡처/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2018년에 『말모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유해진, 윤계상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고난과 노력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후, 한글날이나 광복절에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그대로 독립운동의 치열한 현장이었습니다. 정말 목숨 내놓고 하는 투쟁이었죠. 그 무렵은 이미 국내의 독립운동이 거의 다 궤멸 상태에 이르러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상황이었고,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 세력도 사분오열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이간질에 맥을 못 추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제는 말이 그 민족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과정에서 회원 대부분이 옥살이하고, 두 분은 옥중에서 순국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추진했던 조선어 사전 원고는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숱한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겼는데도, 그들이 만든 사전 원고는 끝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해방 후에 우체국 창고에서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국어대사전의 출발이 됩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당시 지리멸렬하던 독립운동 중에서 유일하게 일제가 승리하지 못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회원 모두가 목숨을 바쳐서 사전 원고를 지켰고, 그럼으로써 일제와 벌인 싸움에서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난 것입니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와 승리를 쟁취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청산리 대첩이나 기억하지 이런 위대한 사건은 정말 우습게 봅니다. 그 증거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우리말 취급 실태입니다. 남의 나라말을 쓰기 위한 조사나 토씨 정도로 여기죠.

그런데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국어를 전공으로 하여 살아온 저는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불발로 그친 최초의 한국어 어원사전 원고를 마련하면서, 제목을 ‘사전’이라고 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말모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옛날에는 쓰지 않던 말이어서 당시에 사전을 준비하던 주시경 선생이 만든 말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사전’은 한자 말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모으는 그 책에다가 우리말 이름을 붙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작 어원사전을 준비하면서도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전’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 후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많은 말들을 만들어 냅니다. ‘변또’를 ‘도시락’으로 바꾸고, ‘오뎅’을 ‘어묵’으로 바꾸었죠. 그런 말 중의 하나로 ‘사전’을 ‘말모이’로 바꾸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사전을 대체할 말에 관해서 고민한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예컨대 ‘말광’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광’은 곡식이나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로, ‘고방(庫房)’의 준말이죠. 그러니 말광은 말의 창고라는 뜻이죠.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요? 이런 말들은 그런 생각을 하려는 분들의 마음에서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도 사전을 대체할 말을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말꽂이’가 그것입니다. ‘책꽂이’의 ‘책’을 ‘말’로 바꾼 것이죠. 어떤가요? ‘말모이’나 ‘말광’이라는 말에는 서열이나 순서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꽂이’에서는 가지런한 순서까지 느껴지죠. ‘사전’이 워낙 일반화되어서 쓰일 가능성은 없지만, 이런 시도를 해보는 것이 우리말을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전을 ‘말꽂이’로 바꿔주세요. 하하하.

해방 후 우리는 교과서를 만듭니다. 그때 교과서 제목을 보면 이런 부끄러움을 또 느낍니다. ‘셈본, 독본’ 같은 말이 그것이죠. ‘셈본’은 ‘산수’를 거쳐서 ‘수학’으로 자리 잡습니다. ‘말본, 독본’도 ‘국어’로 자리 잡죠. ‘말본’은 우리가 아는 국어책이고, ‘독본’은 읽기용 책입니다. 좋은 글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본’은 한자말 ‘本’인데, ‘본뜨다’는 말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 워낙 뿌리 깊게 쓰인 말이어서 이렇게 쓰였습니다. ‘국어’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어를 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우리말이 ‘국어’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익숙함이 쉽게 ‘셈본→수학’으로 자리 잡는 동력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초등학교 수학은 수학이 아니고 셈이니, ‘셈본’이라고 쓰는 게 더 나을 듯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와 연계되는 상황을 고려해서 중고등학교에서 쓰는 수학을 미리 끌어다 쓰는 형국인데, 제가 보기에는, 말만 어렵지 학생들에게는 부담만 주는 말입니다. 앞으로 숫자 지옥이 평생토록 준비되었다는 선전포고로 들립니다. 이른바 ‘수포자’가 교실 가득한 현실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죠.

‘문교부’도 ‘교육부’로 바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덩달아 이 이름 저 이름으로 바뀌다가, 이제는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뀌었습니다. 가만히 정부 기관 명칭 변천사를 보면 말장난한다는 느낌입니다. 다음 정권은 무슨 말장난으로 국민들을 골탕 먹일지 은근히 기대됩니다.

사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전이 ‘말모이’를 버리고, ‘사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참에 사전을 모조리 ‘말모이’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싶지만, 순우리말에다가 모조리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토를 단 한글학자들에게는 쓴소리가 될 듯하여,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것을 다시 삼켰다가, 결국은 이 글 쪼가리 한구석에다가 저의 불편한 심기를 이렇게 드러내 봅니다.

우리 말의 어원을 한번 파보자는 이 글에서 어원 논의는 시작도 못한 채 허영기로 가득 찬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연거푸 쓰게 되는 것을 보고, 저도 정말 꼰대가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정치인들을 혼내는 것은 유권자이고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언어 허영기로 가득한 이 어리석은 국민들을 혼낼 사람은 누구일까요? 없습니다. 온 국민이 미쳐서 남의 말로 제 혀를 꼬부라뜨리느라고 정신 나간 짓을 날마다 합니다. 오렌지, 오륀지, 올윈지, 하며 어떻게든 미쿡 본토 발음을 따라가려고 안달합니다.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향해 제가 한번 채찍을 휘둘러보지만, 그 채찍은 허공으로 날아오르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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