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한사군의 이름 4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한사군의 이름 4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42-한사군의 이름 4’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6.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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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북대방조(대제각 영인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한사군 말고, 중국에서 붙인 군현 이름 중에는 대방군도 있습니다. 『삼국유사』 북대방 조에 보면 대방은 죽담성(竹覃城)이라고 나옵니다. 대방(帶方)=죽담(竹覃)이죠. 帶와 竹의 짝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帶는 소리를, 竹은 뜻을 고른 것이죠. 둘 다 ‘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方과 覃의 짝은 알 수 없습니다. ‘모 방(方)’과 ‘미칠 담(覃)’자이니, 이 둘의 공통점을 보면, ‘모=및’인데, 뜻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다른 대조가 나옵니다. ‘帶方州本竹軍城’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方은 軍과 짝을 이룹니다. 『삼국유사』의 覃은 軍의 오자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시 눈에 보이는 게 있습니다. 같은 지리지에 보면 ‘三嶺縣今方山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三과 方이 짝을 이루죠. 三은 윷말의 ‘걸’에서 보듯이 우리말에서도 셋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대조어에서 보면 方은 ‘모’가 아니라, ‘걸’에 비슷한 말과 대응합니다. ‘모’는 모서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은 뜻을 지닌 우리말로는 ‘귀, 귀퉁이, 구석, 가장자리, 가생이’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굿, 굳, 굴, 갓’으로 재구할 수 있죠. 만주어로 군대(軍伍)는 ‘kuren’이고, 몽골어로는 ‘kure’입니다. ‘나라’는 만주어로 ‘gurun’이고, 몽골어로는 ‘gürün’이며, 고구려어로도 ‘구루(溝婁)’가 성을 뜻하니, 『삼국사기』의 軍과 『삼국유사』의 覃이 나타내려는 말은 ‘구루’일 것입니다.

띠(帶)는 만주어로 ‘umiyesun’이고, 몽골어로 ‘buse’입니다. ‘구루’가 고구려에서 쓰는 말이므로, 만주어보다는 아무래도 몽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따라서 대방(帶方)은, ‘buse-gürün’을 번역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역사학에 문외한이어서 이와 관련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고구려에 ‘책구루’라는 게 있었다고 나오네요. 이 책구루가 바로 ‘buse-gürün’을 표기한 것이고, 그 한문식 번역어가 ‘대방’입니다. 幘溝婁=buse- gürün=帶方.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내려주었으며, (동이의 부족들은)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옷과 머리쓰개(衣幘)를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 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幘’은 중국어 발음으로 ‘tʃek(先秦)>tʃæk(隋唐)>zé(현대)’입니다. ‘buse’에서 ‘bu’가 생략되고 ‘se’만남은 모양이죠. zé=se.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할 때 한 음절로 줄이는 버릇이 적용된 것입니다. ‘b’는 순경음화(ㅸ)를 거쳐서 단순모음으로 바뀌었다가 발음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의 설명을 보면 중국 측에서 내리는 조복과 옷 머리쓰개를 주고받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 책구루입니다. 책을 주고받는 성이라는 뜻이죠. ‘幘’은 머리에 쓰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상갓집의 상주가 머리에 쓰는 삼베 두건(巾)입니다. 띠 같은 것이 길고 높게 붙었죠. ‘巾’은 ‘뚫을 곤(丨)’ 획이 그 띠를 나타내는 상형 글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帶(띠 대) 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부쎄구루>후쎄구루>우쎄구루’를 액센트 넣어서 ‘체구루’라고 읽고, 원문으로는 ‘책구루(幘溝婁)’ 한문 번역어로는 ‘대방(帶方)’이라고 한 것이죠. ‘衣 服 幘’ 중에서 ‘幘’을 쓴 것은, 몽골어와 비슷한 발음이 나는 말을 고르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구루, 구렌’을 ‘방(方)’으로 옮긴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方은 ‘모 방’ 자입니다. 뜻(訓)이 ‘모’이고 소리(音)가 ‘방’이죠. ‘모’는 ‘모서리’를 뜻합니다. 모서리와 똑같은 말이 ‘귀, 귀퉁이, 구석’입니다. ‘귀’의 옛말은 ‘굴, 굽, 굿’입니다. 받침이 모음으로 바뀌면서 ‘굽>구ᄫᅵ>구이>귀’의 변화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루’와 ‘귀’는 2,000년 전에는 거의 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루’를 방(方)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방군의 위치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네요! 책구루인 대방군은 현도군과 고구려의 접경 지역에 있는 곳이고, 그것도 고구려가 가기를 꺼린 곳입니다. 즉 대방군은 현도군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곳이라는 말입니다. 현도군의 동쪽 경계라고 나오네요. 따라서 현도군의 위치만 결정되면 대방군의 위치도 저절로 정해집니다. 한나라 때의 일이니, 대방군은 만리장성 밖이고, 만리장성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멀게 잡아도 난하와 대릉하 사이의 어느 곳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보니 또 이 책구루를 중국과 고구려가 조공 무역하는 장소라고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같이 나오는 매구루(買溝婁)의 ‘買’가 ‘살 매’자여서 물건을 사고 판다는 뜻으로 이해한 모양인데, 만약에 그렇다면 역사학계의 무지와 무식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건 어원이 가리키는 상황을 무시하고 사건의 정황만을 바라보려고 하는 학자들의 안쓰러운 망상에 불과합니다. ‘買’는 뜻을 취한 글자가 아니고 소리를 적은 글자입니다.

이 ‘買’는 ‘물’을 뜻하는 고구려 말입니다. 買가 물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면 책구루(幘溝婁)나 치구루와 같은 말입니다. 책구루 말고 치구루(置溝婁)도 있는데, ‘책’과 ‘치’는 같은 말(buse)을 달리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치구루를 다른 말로 치성(置城), 책성(冊城)이라고도 했다는데, 이 말들은 구루를 성으로 바꾼 것이고, 幘(tʃek)과 冊(tʃʰek)을 보면 더욱 분명해지죠. ‘책’은 몽골어 ‘buse’의 음차인데, ‘bu’를 강조하느냐 ‘se’를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b와 m은 모두 입술소리로 소리 나는 위치가 같습니다. 따라서 ‘bu’를 얼마든지 ‘mu’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buse>muse’에서 ‘se’가 생략되면 ‘買’로 표기될 수 있다는 것이죠. 결론은 이렇습니다. 책구루=치구루=매구루=대방=buse-gürün.

언어학이 가리키는 어원으로 보면 책구루란 중국과 고구려가 틈이 벌어져서 서로 소 닭 보듯이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관계를 서로 놓지 않으려고 택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한쪽에서 먼저 물건을 갖다 놓고, 다른 쪽에서 나중에 와서 그걸 가져가겠어요? 그저 전쟁만 피하겠다는 서로 간의 암묵이죠. 수틀리면 언제라도 한판 붙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을 조공무역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해석하다니, 그 상상력이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소설을 한 편 써도 이보다는 더 나을 듯합니다. 차라리 제가 소설을 써볼까요?

어때요? 그럴 듯하지 않나요? 이런 발견을 하고 나면 저 스스로 흐믓합니다. 하지만 저의 흐뭇함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많겠죠. 그러니 저의 상상은 일단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자꾸 저를 꼬나보는 역사학자들의 눈길이 뒤통수에 따갑게 와닿아서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하하.

한사군의 명칭이 왜 그렇게 붙었을까 생각해보면 좀 더 의미심장한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 바깥의 동쪽 세계는 ‘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선이 위만조선을 마지막으로 사라집니다. 그러자 그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이 핵분열하듯이 각기 쪼개집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귄위를 되찾으려고 저마다 나라를 세우려 들죠. 이런 세력들을 하나로 뭉치게 놔두면 중국으로서는 다시 ‘조선’ 같은 거대한 나라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로 합치지 못하도록 부족 별로 쪼개어 각기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합니다. 즉 중국의 벼슬을 주는 것이죠. 그러면 각 부족은 제가 우두머리인 줄 알고 그렇게 행세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각기 우두머리가 된 부족들은 조선이라는 몸통에서 메두사처럼 수많은 대가리를 쳐들고 서로를 물어뜯는 아귀다툼을 하게 되죠. 지들끼리 다투느라 바쁜 저들은 중국 쪽을 돌아볼 틈이 없게 됩니다. 중국으로서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않고 변방의 걱정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사군에다가 각기 ‘낙랑(조선 본토), 진번(예맥), 임둔(타타르), 현도(거란)’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끝나자, 이제는 ‘대방군’을 설치합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벼슬을 받아가는 일조차도 귀찮아하자, 중국으로서는 애걸복걸할 수는 없어 슬그머니 조복만을 갖다주고, 고구려로서는 모르는 척 받아주는 시늉만 남은 형식으로 바뀐 것이죠. 이것이 ‘책구루’로 표기된 대방군의 실체입니다.

오늘날 역사학에서 말하는 대방군은 황해도 언저리라고 하는데, 황당무계할 따름입니다.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설령 요동군이 대릉하에 있었다고 해도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 북부와 요동반도 전역에 걸쳤는데, 고구려와 중국의 경계는 당연히 대릉하나 요하일 터이고, 그렇다면 중국 측에서 현도군의 동쪽에 쌓은 작은 성은 그 경계선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방군을 황해도에다가 비정시킬 수 있다는 말인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마자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유물이 쏟아지듯이 발굴됩니다. 1911년 9월 점제현 치지 발견, 1911년 10월 대방태수 장무이묘 발굴, 1911년 10월 대방군 치지 발견, 1913년 9월 낙랑군 치지 발견, 1913년 9월 점제현 신사비 발견. 불과 3년 사이에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위치를 대동강 언저리에 못 박은 그 유물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나타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자료가,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마자 3년만에 마치 마법처럼 뿅! 뿅! 뿅! 하고 나타납니다. 가히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그 뒤로 끝없이 의심받아왔습니다. 저는 역사학계의 이런 논란에 흥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첫 단추가 잘못 꿰인 옷을 아무리 바로 잡아봤자 제 태가 나기는 글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전혀 다른 시각이란 ‘어원’입니다. 어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조선총독부가 찾아낸 그 자료가, ‘어원’이 가르쳐주는 그 방향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위치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조선총독부가 찾아낸 대방태수의 무덤이 있는 황해도가 실제로 대방군이었다면, 한나라와 고구려는 황해도에서 서로 만나 책(幘)과 조복(朝服)을 주고받았다는 얘기입니다. 한나라 측에서 책구루라는 성에 물건을 갖다 놓으면, 고구려에서는 나중에 잠시 들러 그것을 마지못해 받아가지고 돌아갔다는 얘기입니다. 양국 간에 틈이 벌어진 이 냉랭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렇다면 한나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대가 황해도라는 얘기인데, 이건 교과서 국사의 지식으로 비춰봐도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결말입니다. 고구려가 황해도 이남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점제현 신사비 밑에서 조선시대 기왓조각이 나왔다는 발굴 후기보다 책구루의 위치 설정이 더 명확한 ‘유물 조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굴지에다가 자신이 바라는 유물을 심어 학설을 창조하는 것은, 일본 고고학의 오랜 내력이고 전통인가 봅니다. 이젠 자신들도 스스로를 못 믿어 발굴보고서에 외국인 학자를 반드시 하나 끼워넣도록 제도화했다는데, 기본이 안 된 이런 세상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과연 어떤 권위를 지닐지 참 한심할 따름입니다. 아직도 그런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교과서에서 배워야 한다는 게, 참! 그저 말문이 턱! 막힐 뿐입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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