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려 3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려 3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34-고려 3’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5.0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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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대제각출판사 영인본 <악장가사>의 내용.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저는 대학 때 국어를 전공했습니다. 덕분에 평생 국어 공부를 하며 살았죠. 그런데 고전문학 시간에 고려가요를 배우면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서경별곡’이라는 고려가요입니다. 이 ‘서경’이 평양이라고 배웠고,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어원으로 역사를 파헤치다 보니, 저의 믿음에 금이 갔습니다.

평양을 서경이라고 했는데, 이때 서쪽의 기준은 중앙이고, 이때의 중앙이란 고려의 도읍인 개성(송도)을 말합니다. 개성을 중앙으로 놓고 본다면 평양은 서경이 아니라 북경입니다. 평양이 정확히 개성의 북쪽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평양을 서경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첫 번째 드는 강한 의문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고려가요에 나오는 여음구입니다. 고려가요는 당시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였고, 그것을 조선 왕조에서 골라서 악보를 정리한 것이 오늘날까지 알려져 온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 왕조에서는 그 노래를 궁중에서 들으며 옛 추억을 곱씹었죠. 음악이다 보니 의미는 없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청산별곡’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음구가 있죠.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가 그것입니다. 이런 식의 여음구가 노래마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음구가 무슨 뜻인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국어학자들도 골머리를 앓으며 이를 연구합니다. 근래에는 이 구절들이 우리 말이 아니라 몽골을 비롯하여 당시 대륙에 있던 민족들의 노랫말이라는 주장이 솔솔 나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중동에서 케이팝을 부르듯이, 그 옛날 대륙에 흘러다니던 노래들이 고려가요에 끼어든 것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을 결합하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서경의 위치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서경은 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 경도상 개성보다 더 서쪽에 있는 어떤 국제도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려가요에 섞여든 정체불명의 여음구를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에는 만두 파는 회회아비가 나오는데, 회회아비는 아랍사람(서역인)을 말합니다.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는다는 구절이 노래에 나와서 조선시대에는 이 노래가 남녀상열지사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두는 원래 원나라 때 들어온 음식입니다.

자, 이제 많이 압축이 되었습니다. 개성보다 더 서쪽에 있으면서 전 세계 여러 민족이 장사하러 와서 북적거리는 국제도시라면 떠오르는 곳이 있습니다. 요동 지역의 중심도시 노릇을 한 심양(봉천)이죠.(요양이나 본계, 또는 그 근처의 어떤 도시라고 해도 마찬가지.) 심양이 바로 고려시대의 서경이라는 가정을 하면 위의 두 의문은 쉽게 풀립니다. 그리고 공민왕이 요동 정벌을 한 이유도 분명해지죠. 공민왕에게 요동은 원래 우리 땅이었기 때문에 정벌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옛 땅 회복이죠.

이런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공민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요동을 정벌한다고 했을 때, 저는 혼자 속으로 ‘왜 남의 나라 땅을 쳐서 빼앗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국사 시간에 들은 바로는, 고구려 때까지 우리 겨레가 지배했던 요동은 200년간 발해 왕조의 땅이었고, 그 후로는 몽골의 땅이었습니다. 고려 왕조 500년간 요동을 통치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배운 국사 지식으로 요동은 우리 땅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요동 땅을 정벌한다니요? 공민왕과 우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명령을 내릴 수 있나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설명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고려의 북쪽 경계선이 청천강이라고 배웠는데,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려는 발해와 신라의 옛 땅을 차지한 나라인데, 신라의 영역보다 더 졸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한 건 공민왕의 옛땅 회복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했다는데, 그 지역이 평안북도와 함경도 일부 지역입니다. 우리가 아는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관리 구역은 쓸모없는 땅입니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유목민들도 살기 어려운 지역이죠. 그런 지역을 원나라에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에 재갈을 물리는 역할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엉터리였던 것 같습니다.

고려의 서경이 심양이라면 원나라가 빼앗아 차지한 동녕부는 심양이 있는 요동 지역이고, 쌍성총관부는 그 동쪽 만주 지역 어디여야 맞습니다. 고려가 발해로부터 받았던 구역을 몽골이 일어나면서 고려를 몰아붙여 왕조를 유지하게 해주는 대신 영토 일부를 빼앗아서 직접 관리했던 것이죠. 고려는 오랜 항몽 투쟁에서 왕조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적절히 타협한 결과가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원나라에게 내주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 가졌던 의문과 국문학을 공부하며 생겼던 의문이 눈 녹듯이 해결됩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소수의견이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고구려의 국제정치 역사지리』)

발해가 망하자 왕족 대광현이 주민들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여 귀속했으며,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이사온 것으로 이해하지만, 보통 주민을 이끌고 투항했다는 것은 통치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대광현은 그 자리에 있고 고려에서 통치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여 자신의 체제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사 왔다는 설명보다는 이런 설명이 더 적합합니다. 만약에 수만 명이 이사를 오게 되면 원래 있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반드시 역사에 그 흔적이 남게 되죠. 예군 남려가 투항하자 한 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고, 그러자 연제 지역에서 소란이 일었다는 『사기』의 기록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대광현이 고려에 붙었다고 해서 무슨 소란이나 부작용이 일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대광현은 자신이 관리하던 압록강 이북의 발해 땅을 고려에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한반도의 신라 땅과 압록강 이북의 발해 땅을 동시에 다스리는 거대국가를 이루었는데, 뒤이어 몽골이 일어나면서 압록강 이북의 땅을 빼앗겨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인정하는 선에서 원나라와 타협을 한 것이, 우리가 배운 국시 시간의 그 고려 북쪽 경계선 지도입니다.

이런 논란은 철령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왕 13년(1387) 12월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의 설치를 결정하였습니다. 이 ‘철령’을 함경도의 ‘철령’으로 해석하여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철령’과 ‘철령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백두대간의 철령(鐵嶺)은 ‘쇠재(東嶺)’를 뜻하는 순우리말의 향찰표기입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철령위는 행정구역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요동 지역을 통치할 행정관서가 있던 곳의 지명이죠. 그 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 이름으로 쓰입니다.

만약에 함경도의 ‘철령’을 ‘철령위’로 이해한다면, 명나라는 함경도 철령 산꼭대기에다가 행정관서를 설치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다가 행정관서를 설치했을 리가 없죠. 함경도 철령은 그럴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워낙 외진 곳이고, 유사시 중국으로 연락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방이 중국의 오랑캐에게 포위된 곳입니다. 그곳에다가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건, 도대체 꿈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심양은 랴오닝성의 중심도시이니, 이곳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는 뜻입니다. 심양은 고려의 서경이었고, 그래야만 서경은 중앙인 개성의 서쪽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의 평양은 그냥 평양이고, 심양은 서경이었는데, 이때 서경은 이름이 평양이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고려에는 평양이 둘이었는데, 그 하나는 요동에도 있었다는 뜻이죠. 그것이 서경입니다. 아마도 요동에 있던 평양이 서경 노릇을 못 함으로써 한반도 안의 평양에 서경이라는 이름이 옮겨붙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서경이라고 배웠ᅌᅳᆯ 테고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당나라가 욕심을 부려 직접 지배하려고 안동 도호부를 설치합니다. 이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한반도 안에 욱여넣으려고 조선시대의 유학자, 일제강점기 어용학자, 국내의 식민사학자들까지 애를 쓴 결과 우리는 국사 시간에 이상한 국사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챈 김유신이 목숨 걸고 싸워서 당나라와 타협을 봅니다. 철령과 호로하를 잇는 선을 당과 신라의 국경으로 정한다는 것이죠.

어용 사학자들로서는 철령이 함경도의 백두대간에 있으니, 나머지 호로하만 만들면 됩니다. 그래서 호로하를 임진강이라고 가정하고 식민사학에서는 당과 신라의 국경선을 함흥(철령)과 임진강을 연결하는 선(추가령 지구대)으로 정리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렇게까지 한국사를 축소 시키려 애쓰는 식민사학자들의 지극정성과 일편단심은 정말 감탄스럽기까지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 정신을 한국사에 그대로 담아내신 것이죠. 마침내 신라의 통일 강역을 한반도의 절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철령은 심양의 북쪽 랴오닝성에 지금도 도시 이름으로 있습니다. 삼국 ‘통일’이 맞다면 신라의 통일 영역은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삼국통일’이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 위에서 추론해야 역사가 올바르지 않을까요? 철령이 랴오닝성에 있다면 호로하는 요하나 대릉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요하는 고구려의 땅이었으니, 중국과 경계선이 된 호로하는 당연히 대릉하쯤이 되어야 합니다. 김유신이 당나라와 타협하여 맺은 국경선은 랴오닝성의 철령과 대릉하를 잇는 선입니다.(호로하가 대릉하인 까닭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김유신이 당나라와 애써 성사시킨 타협은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합의 본 지 30년도 채 안 되어 발해가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당나라와 맞서 싸운 김유신의 노력도 무의미해져 신라는 한반도로 철수하고, 그 자리에 해동성국 발해가 들어섭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를 비집고 거인처럼 우뚝 일어선 것이죠. 그 발해와 신라의 뒤를 이은 나라가 고려입니다. 고려의 초기 국경선이 청천강 이남일 수가 없습니다. 원래 발해가 차지했던 고려의 북쪽 땅을, 몽골은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로 나누어 관리했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그것을 수복하려 했던 것이고, 요동 정벌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왕건은 자신의 왕국이 고구려를 이었다는 뜻으로 국명을 ‘고려’로 했습니다. 만약에 청천강 이남을 차지했다면 그가 어찌 고구려를 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까요? 초기 고려의 영토는 랴오닝성의 철령과 대릉하를 잇는 선의 동쪽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김유신과 당나라가 타협을 본 그 선이죠. 심양은 그 지역 일대를 다스리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들어간 역대 왕조는 모두 이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청나라도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한 뒤, 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가 이곳을 수도로 삼아서 중국 공격의 교두보로 삼았습니다. 결국 3대 순치제에 이르러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만리장성을 넘는 데 성공하죠. 청나라가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겁니다.

북경을 수도로 삼은 뒤에도 청나라는 심양을 ‘성경(盛京)’이라고 하여 중요한 배후도시로 여겼습니다. 일제가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을 때도 이곳을 도읍으로 삼아 ‘봉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려가 진정으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면 이곳을 차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엉뚱한 이야기로 교과서를 가득 채웠죠. 고려가요에 남은 여음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소리이자 노랫가락입니다. 그 소리는 결코 한반도 안의 도시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이 글 때문에 자료를 찾느라고 대제각출판사에서 나온 『악장가사』 영인본을 펼쳤는데, 서경별곡에 ‘서경이 아즐가... 닷곤ᄃᆡ 소셩경 고ᄋᆈ마른’이라고 나옵니다. ‘서경=小셩경’입니다. 앞서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심양이라고 했는데, 심양의 청나라 때 명칭인 셩경이 ‘서경별곡’에 나옵니다. 물론 고려 때의 노래이기 때문에 이 셩경이 심양을 뜻한다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 검토가 필요합니다만, 제 눈에는 참 희한한 우연의 일치로 보여서 심상치 않습니다. 만약에 성경(盛京)이란 말이 고려 때도 쓰인 말이라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를 입증할 방법이 없고 또 자료를 뒤적이자니 귀찮네요. 그래서 힌트만 남기고 이쯤에서 덮어둡니다.

사족 하나 붙이자면, ‘高麗’를 읽는 소리값에 대한 의문입니다. ‘高句麗’는 ‘고구리’를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옳다면 ‘高麗’에 대한 소리값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니, 역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숲에 가서 혼자 떠드는 수밖에 없네요.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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