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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작품 대부분은 고통과 고난을 통한 영(靈)적인 성장과정을 그린 전통적인 인문학의 범주에 속한 소설들입니다. 그의 작품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부처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세존(世尊) 고타마 싯다르타(B.C.560~B.C.480)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주인공 《싯다르타》라는 인물의 내적 성장과정을 그린 종교적 색채를 띤 영혼의 전기입니다. 이 소설은 2,500년 전, 인도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닫는 과정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유복한 바라문(=브라만) 계급 출신입니다. 인도 카스트 제도 중 최상위 승려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강하고 아름답고 늠름하고 예의 바른 모습과 총명한 머리로 부모의 사랑은 물론 다른 바라문의 젊은 딸들의 심장 속에도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치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에게는 뜻을 함께하면서 성장하는 바라문 아들인 친구 ‘고빈다’가 있습니다. 고빈다는 항상 친구인 《싯다르타》를 존경하고 따르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정신적 수행의 세계를 떠나다
《싯타르타》는 내면 속에 삼라만상의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완전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합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스승으로부터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대부분 받았으나 어디에서도 자신만의 자아(自我)를 찾아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는 이 근원적인 샘물에 목말라했습니다.
어느 날 머리를 깎고 떠돌아다니며 도를 닦는 탁발승인 사문(沙門)들이 이 마을을 지난 적이 있었습니다. 순례 행각을 하는 고행자인 그들은 딴 세상 사람들로 반은 벌거벗은 몸뚱이로 햇볕에 그을려 바싹 마른 체구였지만, 정열과 헌신과 자기 초탈의 향기가 확 풍겨왔으며 싯다르타는 그들에게서 영적인 찬란함을 느꼈습니다.
그날 저녁 명상을 끝내고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내일 아침 자신은 사문들에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고뇌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의 자부심인 아들이 며칠씩 옴짝달싹 않은 채 자신의 동의를 얻으려는 확고한 모습에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지못해 허락을 합니다. 날이 새자마자 그가 떠나려고 움직였을 때 외딴 오두막에서 웅크리고 있던 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순례자에게 따라붙었습니다. 친구 고빈다였습니다.
《싯다르타》 앞에는 오직 한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갈증으로부터, 소원으로부터, 꿈으로부터,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 일상의 감정과 욕망에서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는 온갖 사념(邪念)들로부터 생기는 감각적인 사고를 마음으로부터 비움으로써 자기 초탈(自己超脫)의 길로 갔습니다.
그의 곁에는 고빈다가 있었지만 봉사와 수행에 필요한 것을 빼놓고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3년간 떠돌아다니는 동안 영혼이 몸을 떠나 만물 속에서 사물을 체험하는 법을 익혔지만, 자신의 신체로 돌아오는 과정 속을 벗어나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불교의 진리인 공(空)의 진리를 잠시 깨닫는 듯하지만, 아직 육체적 자아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 그의 깨달음을 묻다
그때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불리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죽음과 재탄생이라는 윤회(輪廻)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세존 부처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완성자 그 자체입니다.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사문(沙門=출가한 승려)을 떠나 고타마가 가장 즐겨 찾는 숲속 기원정사(祇園精舍)라는 절로 가 고타마를 만났습니다. 그의 완벽한 평온함, 고요한 모습 그 자체가 진리를 말해주고, 진리를 호흡하고, 진리의 향기를 풍기고, 진리를 현란하게 빛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세존의 확고부동한 목소리로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4성제(四聖諦)와 8정도(八正道) 불법을 들었습니다. 부처가 설법을 끝냈을 때 고빈다는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 물었습니다.
“친구, 자네는 도대체 해탈의 길을 걷지 않을 작정인가?
주저하기만 하고 기다리기만 할 셈인가?”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무슨 이유로 부처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그 가르침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자기에게 제발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를 재촉해댔습니다. 《싯다르타》는 우연히 세존 고타마와 마주치게 되었고, 자기의 의문 사항을 아주 공손하게 질문하고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 세존께서 몸소 겪었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 이 점이 바로 제가 다시 편력(徧歷,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경험하는 일)의 길을 다시 계속하려는 이유입니다.”
세속으로 들어가다
고빈다는 승려가 되었으며,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자신이 부처처럼 몸소 경험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깨닫기 위해 이제 홀로 수행 길로 떠납니다. 그동안 숲속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탈속(脫俗)의 세계에서 활동했지만, 이제 강을 건너면 세속(世俗)의 세계, 육신과 감각의 세상, 도시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싯다르타》는 숲을 떠나 강을 건너 사람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한동안 걸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추구함이 없는 이처럼 단순 소박하게,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비로소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예전에도 그 자리에 항상 있었지만, 여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런 일에 끼어든 일도 없었습니다.
강가에 있는 한 뱃사공의 초가집에서 잠을 자던 날 밤, 《싯타르타》는 꿈을 꾸었습니다. 고빈다가 자기 앞에서 누런 법복을 입고 웬일인지 슬픈 표정 지으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싯타르타》는 세속으로 가려는 자기결정에 대해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싯타르타》는 뱃사공인 집주인에게 강 건너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뱃사공은 강을 건너며 이렇게 말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강(江)입니다. 난 이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자주 이 강의 눈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리고 이 강으로부터 배워왔습니다. 우리는 이 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뱃사공은 멈춰서서 삶의 흐름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싯다르타》는 그 뱃사공이 고빈다와 같은 사람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겸손해하고, 모두를 기꺼이 벗이 되고자 하고, 기꺼이 순종하려 들고, 자기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라고 느껴집니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 무리의 하인 하녀들과 우연히 마주칩니다. 네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 한가운데 그들의 여주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 여인의 모습을 보고 기쁨에 들떴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기생 ‘카말라’였습니다. 그녀는 큰 정원 말고도 집 한 채를 더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싯다르타》는 하인에게 젊은 바라문이 대화 나누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여주인에게 알려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는 사문이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3년이 되었고, 이 도시에 와서 맨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고,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친구이자 자기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카말라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합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많은 젊은이들이 바라문의 아들이거나, 큰 부자들로 아름다운 옷이나 세련된 신발을 신고, 머리카락에도 좋은 향내가 나며, 지갑에는 돈을 두둑이 넣어 가지고 오는데 당신은 그 어느 하나 갖추지 못했다며 대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싯타르타》는 자신이 세 가지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색할 줄 아오.”
“나는 기다릴 줄 아오.”
“나는 금식할 줄 아오.”
이는 《싯타르타》가 현재 돈도 없고 살아가는 기술도 없을지라도,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이 자기인식과 지혜로 인내심과 평정심,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이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시를 좀 지을 줄 안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카말라를 위해 시를 짓자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을 소개해줄 테니 가서 장사하는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인의 종업원이 된 그는 손해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종업원으로서 그 현실 자체를 즐겼습니다.
사람들이 돈이나 사소한 즐거움, 하찮은 체면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고 괴로워하고 늙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욕하고 모욕을 주는 것을 보았고, 사문이라면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고통 때문에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과거 사문 시절, 신들이나 바라문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만큼이나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카말라를 찾아가서 사랑의 기교를 배우고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점점 사문들에게 배운 것들, 고타마에게 배운 것들, 바라문인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들은 점점 하나둘씩 먼지로 뒤덮여 갔고, 그 대신에 장사하는 법,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법, 여자들과 즐기는 법, 아름다운 옷을 입는 법, 하인들을 부리는 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물속에서 목욕하고, 하인들이 끄는 가마를 타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잠자고, 술을 마시고, 도박하며, 무희들을 감상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내면 속에 깨어 있어서 매번 자신을 이끌어 주던 그 밝고 확실한 음성이 이제는 침묵을 지키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이라는 덫에 빠져 명예·쾌락·욕구·재산과 부에 대한 탐욕이라는 잘못된 인생행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세속을 떠나 강에서 뱃사공이 되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카말라가 새장에 기르는 희귀한 새가 나오는 꿈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 새는 뻣뻣하게 죽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꺼내서 밖으로 휙 하니 집어던졌습니다. 후다닥 잠에서 깨어났고 깊은 비애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사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년 시절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사문 생활을 선택했을 때 들었던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 이 상태를 떠나라”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지금까지의 도시생활은 이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고, 그의 마음은 권태와 번민,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벼락이나 쳐서 자신이 박살나기를 바랐고, 호랑이가 자신을 먹어 치웠으면 좋을 정도로 정신적 황폐함이 바닥까지 와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정처 없이 걷다 어느덧 숲속에 있는 강가에 이르렀고, 젊은 시절 고타마가 사는 숲에서 도시로 빠져나올 때, 어떤 뱃사공이 이 강을 건너다 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이 개 같은 육신을, 타락한 이 영혼을 파괴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강물 속을 응시하였습니다.
너무 혐오스러워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습니다. 두 눈을 감은 채 곧 죽음을 향해 떨어질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라문 기도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내뱉는 “움”이라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고, 지금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잠시 피곤함을 느껴 단잠에 빠졌고, 깨어났을 땐 전과 다르게 상쾌하고 활기찬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 맞은편에 잠자는 《싯다르타》를 지켜주던 법복 입은 승려가 서 있었습니다. 고빈다였습니다. 처음에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를 알아보고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자기도 친구와 마찬가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도(道)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지금 순례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자네가 순례를 하고 있다니까 그 말을 믿도록 하지. 싯다르타.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겠네만 어쩐지 자네 행색은 순례자처럼 보이지 않는군. 자네는 부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지체 높은 사람이 신는 신발을 신고 있어. 그리고 좋은 향수 냄새가 풍겨 나오는 자네 머리카락 역시, 사문의 머리카락은 아니네 그려.”
《싯다르타》는 떠나는 친구 고빈다를 멀리까지 바라보았고, 아직도 그 충직하고 고지식한 친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가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강물로부터 무언가 배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강물과 강물의 비밀들을 이해하는 자라면 다른 많은 것도, 많은 비밀들도, 나아가 모든 비밀들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강가 나루터에서 옛날 그가 젊은 사문이었을 때, 그를 건너 주었던 바주데바라는 뱃사공을 만났습니다. 바주데바는 매우 주의 깊게 《싯다르타》의 말을 들었습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진지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중에는 칭찬이나 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싯타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느꼈습니다. 바주데바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강이었고, 당신도 강으로부터 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시간이 흘러 많은 여행자들은 그 두 뱃사공을 보며 그들이 형제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가리키며 강가에는 두 사람의 현인 또는 성자, 내면의 치유를 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마술사가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카말라는 죽고 아들에게 버림을 받다
어느 날 세존 고타마가 위독하여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방방곡곡에서 순례 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속에 카말라도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카말라가 나루터 근처에서 쉬고 있을 때, 작고 검은 뱀 하나가 그녀를 물었습니다.
살려달라는 외침이 바주데바의 귀에 들렸고 바주데바는 바로 달려가 죽어가는 그녀를 그들의 오두막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거기서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다시 만났고, 지금이 그에게 젊은 사문 시절의 모습과 훨씬 닮았다고 말하며, 저 소년이 당신 아들이라고 말을 전해주고 《싯다르타》곁에서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열 한 살 되는 이 아이는 한동안 이 오두막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한테 귀여움만 받으면서 응석받이로 곱게만 커서 그런지 천방지축 버릇없는 아이였습니다. 《싯다르타》는 그가 이 낯설고 가난에 찌든 환경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아이의 마음을 얻고자 사랑과 정이 가득한 인내심으로 버텼으나 바주데바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당신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제발 번뇌와 고통, 환멸이 없었으면 바라는데, 설령 당신이 그 애를 위해 열 번을 죽는다 해도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나 덜어줄 수 없소. 무슨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소? 가르침, 기도, 훈계를 통해서…….”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인간의 무력함과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충고를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이토록 맹목적으로,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 이토록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렇지만 이토록 행복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싯다르타》는 아버지에게 격하게 대들고 뱃삯으로 받은 돈을 몰래 가지고 나룻배를 훔쳐 타 도시로 도망쳤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뗏목을 만들어 그 아이를 찾아 나섰고, 과거 살았던 카말라의 소유였으나 불가에 시주한 아름다운 정원 입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정원 내부를 들여다보니 누런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 아름다운 나무 아래에서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을 파멸시키고 싶은 욕망을 다시 느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정원의 정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들을 위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아들에 대한 집착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뒤쫓아 온 바주데바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강가의 오두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타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는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소유나 통제가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탐욕조차도 삶의 원동력이다
《싯다르타》는 강으로 돌아와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는 많은 여행자들을 강 건너로 건네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도 예전과 달리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 많고,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더 이상 웃음거리나 어린애 같은 짓으로 생각되지 않고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만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이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사랑하다가 놓아줄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존재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좋고 나쁨의 판단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세상 전체를 연민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강물 소리를 듣는데 온통 몰두하였으며 마음을 비운 채 그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탄식과 분노, 쾌락과 번뇌, 선과 악, 일체의 그리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생명의 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 두거나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를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처의 모습이고 현자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다
이제 늙은 바주데바는 뱃사공을 그만두고 숲속으로 들어가고, 《싯다르타》는 홀로 남아 뱃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빈다는 순례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인으로 여겨진다는 늙은 뱃사공 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ᆢ 고빈다는 처음에 그 사람이 《싯다르타》인줄 모르고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자기에게 한마디 조언을 구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구도자는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있어 자기 내면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자유로운 상태, 열려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 살아가는데 올바른 행동을 하는 데 도움 되는 어떤 믿음이나 지식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이제 모든 사람과 순간을 통해 배운다며, 자신이 옛 시절 숲속에서 수행할 때 고행자들에게 등을 돌렸고 고타마조차 그를 불신했지만, 그 이후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기생도, 몇몇 주사위 노름꾼들도, 언젠가 만난 불제자 한 사람과 뱃사공 바주데바도 있다면서 그중 바주데바에게 가장 많이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사상이라든가 어떤 인식이라든가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달라고 재촉했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얻은 생각 중의 하나는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싯다르타》는 삶으로 겪지 않으면 진짜 알 수 없고, 본질을 말로 다 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해탈이나 미덕,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있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해탈이나 미덕, 열반이라는 단어만 존재할 뿐입니다.
《싯다르타》의 최고의 생각은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하나의 단일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면적이고 다 반쪽에 불과해서 한 인간이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는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찬 경우도 없다고 말합니다.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보이고,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싯다르타》의 과거의 모든 고통, 욕망, 방황조차도 필요했으며 진리의 일부였다는 것입니다.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언젠가는 이런 것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며, 모든 것은 인연(因緣)이나 조건에 의해 생기므로 고정된 자아나 실체 없다는 불교 철학과 관계가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이나, 세상을 설명하는 일이나,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고, 자신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하고,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빈다는 세존 고타마에서 느끼는 “성인(聖人)이다”는 그런 느낌을 《싯타르타》에게서 찾았습니다. 고빈다는 고요하게 앉아 있는 《싯다르타》에게 큰 절을 올렸습니다. 《싯다르타》의 미소에서 완성자 부처 고타마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늘 자아를 찾는 사람에게 《싯다르타》는 긴 울림을 주는 책입니다. 종교학자 배철현 교수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별이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고통, 방황을 통하지 않고 특정 사상이나 교리에 순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발견한 별을 자신의 별로 착각하며 사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힘들고 고된 삶의 여정이지만, 스스로에게 유일하고 감동적인 나만의 길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책이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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