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山頂), 정신과 영혼의 안식처를 향하여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
표범 우는 소리 쓸쓸해지면 가만히 잠재운다 그래요..... 그래요 내 안에 표범이 들어왔어요 이슬 같은 눈빛의 표범 잠자던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고 창밖 회오리바람도 표범의 울음으로 들려요 영혼의 주파수가 자꾸 엉켜요 일제히 일탈중인 삶의 의문부호들 건망증 많던 자물쇠는 이미 길을 잃었죠 내게 깃든 표범이 자꾸 아파와요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어요 긴 다리 표범은 몸을 둥글게 접어요 태고 적 생명의 아름다운 태아처럼 너무 소중해 안쓰러워요 머리털에 배인 야생의 그리움이 눈물로 번져나가고 있어요 두 손으로 지그시 눌러줘요 뒤척이던 표범은 더 이상 울지 않아요 광야曠野 같은 고요가 내 몸을 통과할 때 난 알아요 내 안의 표범이 자라고 있다는 걸 표범 우
냄새의 기억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눈, 산수유, 성탄 그리고 아버지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聖誕祭 가까운 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2030년 지혜의 왕으로 알파고가 선임이 되고 모든 인간은 알파고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칙령이 포고 되었다 오늘 결혼하는 두 사람은 최대 10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음을 축하드립니다. 단 재계약은 불허하나 다른 이들보다 장기간 허락 된 것은 두 사람의 계약조건이 세부적으로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진화가 진행 중인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번식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결혼기간 동안 화학물질에 의해 일시적인 판단마비 상태에서 최대 3년 유지가 가능하며 그 관성으로 나머지 7년을 지속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아이는 3년간 양육이 가능하며 그 이후는 국가가 맡아서 관리합니다. 두 사람은 면접권이 있으며 아이에 대한 소유권은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
미망의 시대를 향해 열린 여성의 실존과 자각 月沈千嶂靜 川影數星澄 竹葉風煙拂 梅花雨露凝 生涯三尺劍 心事一懸燈 惆悵年光暮 衰毛歲又增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낀 별빛 밝은 밤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 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 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 김호연재, 야음(夜吟), 전부 (이숙희 역)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김 호연재(1681-1722). 흔히 호연재 김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 여성 이름의 확장성이 미흡한 탓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그냥 김씨...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 걸출한 문인에 대한 예의가 아
‘삶의 위로’ - 감성과 서정, 무디어진 내면을 충전하라 이것은 여인의 얼굴처럼 부드러운 저녁 엄동설한 속에 피어난 기이한 저녁 박명 위에 떠도는 감미로움은 마음의 상처 위에 가느다란 실 되어 내려온다. 천사같은 초록빛... 핏기 잃은 장미꽃... 멀리 부드러운 개선문이 흐릿해지고 푸르스름한 서양에 내리는 밤은 고통스러운 신경에 그지없이 부드러운 안식을 부어준다. 검은 바람, 납빛 안개의 달에 가을 낡은 꽃잎들은 떨어졌고 반음계의 아름다운 하늘 빛깔은 마지막 음계를 지워간다.. 그 옛날 향기 스며있는 옛 저택을 따라 나는 내 손가락에 매혹적인 꽃향기를 들이마신다. 이것은 여인의 얼굴처럼 부드러운 저녁. - 알베르 사맹, ‘저녁’ 전부 [굿
말간 핏줄 거울을 달고 지구의 새 역사를 걷는 아기 언제 갓 태어난 아기의 발바닥을 만져보았던가 희고 매끄러운 탄성 핏줄 환히 들여다보이는 처녀지 주름 한 줄 없다 그늘 하나 없다 울면서 뻗치는 저 당찬 힘, 여린 발바닥 어디에 저런 단단한 항의가 서렸는지, 거친 세상 밖으로 나올 힘을 지녔던지, 어미 보호벽을 뚫고 나온 어린 전사의 발바닥을 쓰다듬어 본다 다섯 개 발가락마다 말간 핏줄거울을 달고 지구의 새 역사를 걸으려 하는 먼 우주로부터 지구별로 날아든 새 생명, 거대한 코끼리 발바닥보다 더 야무지다 한 개인사가 가족의 역사가 저 주먹 쥐고 내뻗는 발힘으로 새 터를 다지고 있다 - 김금용, ‘전사의 발바닥’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
쉽게 읽히지만 무엇인지 들키지 않는 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시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 황인찬, ‘실존하는 기쁨’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지금은 어떤
어머니, 누나, 석류꽃, 뻐꾸기, 햇빛 그리고 나는…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
추억의 현재 진행형 바다를 나누는 일도 마음으로 먼저 한다는 여기서 나의 눈은 혼자 그물을 걷고 있다 그가 오목교를 지나 포장마차에서 보내던 겨울은 넝쿨이 된 손을 잡고 천천히 지나고 나의 소리는 어딘가에서 쉬지 않고 돌아온다 언젠가는 나를 향해 그물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죽은 눈은 웃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서 돌아갈 이유가 되진 않겠지 나는 나의 새로운 이름을 짓고 있다 여기서 꽃을 피우는 비법을 조금 전 하나 더 찾았다는 테이블 위에 소주를 세 병째 갖다 놓고 미역국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누구에게 축하인사를 해야 하는 것인가 꽃잎은 흐르는 물에 있어야 흘러가는 것일까 다리 위로 걸어 나가는 너의 눈을 본다 입맛을 당기던 숨소리 들리는 여기서 세
개여울의 기다림,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김소월, ‘개여울’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21세기 벽두, 어느 시 전문 계간지가 문인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우리 문학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설문조사에서 첫 번째로 꼽힌 김소월, 32살의 짧은 생애, 그리 많지 않은 작품을 남기고 간 그의 시를 나지막히 읽노라면 일정한 리듬이
황산벌의 신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동안거 자작나무 숲에서 귀 기울인다 산문을 지나면 계곡 길 지문을 묻히는 바람 같이 산을 오르네 바위를 지나고 잡목 숲과 억새 덤불을 스칠 때 소소한 바람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로 들리네 몸에 닿은 소리는 내부를 거쳐 데워지고 신경을 따라 불빛을 깜박이다 사라지네 생각하네 초겨울 산사에서 동안거에 든 사람은 계곡의 어느 여백 속으로 옮겨 다니다 바람으로 숨는지 경을 읽다가 또 무슨 소리가 되어 산봉우리 끝으로 가서 자신을 버리는지 아니면 겨울의 땅 툰트라 지대에서 경을 외는 눈송이로 날아다니는지 산을 오르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희디흰 경의 뼈를 보는 일이네 높게 솟아 가지런히 동안거에 든 불국의 숲 그 산
사람은 차타고 차는 배타고, 다시 사람이 어여차 창틀에 먼지가 보얗던 금남여객 대흥동 버스 차부 제일 구석에나 미안한 듯 끼여 있던 회남행 금남여객 판암동 세천 지나 내탑 동면 오동 지나 몇번은 천장을 들이받고 엉덩이가 얼얼해야 그다음 법수 어부동 ‘대전 갔다 오시능규, 별고는 읎으시구유’ 어쩌구 하는데 냅다 덜컹거리는 바람에, 나까오리를 점잖게 들었다 놓아야 끝나는 인사 일습 마칠 수도 없던 금남여객, 그래도 굴하지 않고 소란통 지나고 나면 다시 ‘그래 그간 별고는 읎으시구유’ 못 마친 인사 소리소리 질러 기어이 마저 하고 닳고 닳은 나까오리 들었다 놓던 금남여객 보자기에 꽁꽁 묶여 머리만 낸 암탉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금남여객 하루 세차례 오후 네시 반이
이런 사랑을 지켜보는 치자, 치자꽃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스마트폰을 위하여 기도하다 더 이상 사람들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어디서고 대화의 상대는 살아있는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어떤 것보다 스마트폰을 사랑한다 사각의 얼굴을 보면서 말하고, 듣고 기억을 찾으며, 기억을 심어주기도 한다 스마트폰은 21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변이된 생명체! 살아있는 것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듯 스마트폰도 원죄가 있을 것이다 죄가 없고는 저토록 사랑받을 수 없다 죄가 없고는 저토록 자유분방할 수 없다 오늘은 일요일 사랑하는 지렁이보다 스마트폰을 사랑하는 나는 스마트폰의 죄를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원죄를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 김상현, ‘스마트폰을 위한
지구 끝에서 들려오는 순수한 언어의 노래 라일락 꽃잎을 헤치듯 얼음판 위를 달리듯 네가 아빠하고 부르면 나리, 너의 그 고운 목청의 떨림에 개울물에 잠긴 흰 조약돌처럼 찡하니 마음이 시렵단다. 이 지구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순수한 언어, 나무들이 숨소리 같은 그 언어들을 나리, 네가 일깨워 준다. 숙취 끝에 떨리는 안개, 손톱에 끼이는 때, 한낮을 울리는 백묵에, 긴 하품, 의자에 삐걱이는 바지통, 마른 수양버들, 담뱃재, 하염없이 잠든 뮤즈, 그런 틈바귀에서 나는 종종 네 목청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꽃술 위에 피어나는 햇빛으로 나의 일상은 별이 돌고 뜨거운 것으로 내안內岸에 가득 찬다 - 홍희표, ‘지구 끝에서’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 스무살 청년,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나서는 젊은이들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는 졸업식 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넝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시간 거리의 직행 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
머리와 마음을 비울 때 발견하는 ‘나의 기쁨’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와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를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 천양희, ‘나는 기쁘다’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