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존경할 만한 인물을 물으면 일부는 링컨이나 처칠 같은 외국인을 말하지만, 나는 감히 세종대왕이라고 말합니다.
세종은 그저 성군(聖君)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좀 부족한 느낌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입니다. 세종 시대에 이루어진 창조적 업적은 대한민국의 국운 융성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세종의 재임 시기는 수성기(守成期)입니다. 수성기란 창업 후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혁명이나 건국이라는 창업의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 나라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안정화되어 가는 시기를 뜻합니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올랐다 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은 무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심을 얻기 위한 뛰어난 리더십과 백성을 위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태종 본인이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거머쥔 지 20년이 지났고, 이제는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로 이를 위해서는 열정과 의지, 그리고 뛰어난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리더십이 요구되었습니다.
태종은 형제 난(亂)을 통해 왕권의 장자(長子) 승계가 원칙이라고 생각하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택했으나 수성의 리더십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충령대군(忠寧大君) 세종으로 왕을 교체했고, 그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박현모의 《세종의 수성 리더십》을 통해 세종의 탁월한 국가경영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용적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정책
세종은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웃 대륙에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명(明)나라와의 사대(事大)관계를 명확히 하였습니다. 명나라 사신들의 과도한 요구와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사대의 예를 극진히 하며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명나라와의 돈독한 관계 유지는 어지간한 희생이 있더라도 지켜내자는 것이 그의 의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명나라의 후원을 받아 여진족 토벌 및 4군(郡) 6진(鎭)의 북방영토 개척과 같은 중대한 국가적 사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 중반에 ‘소 1만 마리 요구사건’이 있었습니다. 옷감과 비단을 줄 테니 농사에 쓸 소 1만 마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무리한 요구였지만 세종은 단칼에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의 생산이 심히 적고 소의 몸집이 작지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한결같이 성의를 보이는 예의를 다하여 중국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대마도 왜인, 북변의 여진족의 귀화가 빈번했습니다. 이는 세종의 어진 정치 때문일 것입니다. 세종은 그들을 최대한 배려했으며 마치 우리의 백성처럼 대했습니다. 집과 벼슬을 주고, 혼인도 시켜주었으며, 세금 감면 혜택도 주고, 매년 연말에는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귀화인 활쏘기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경연은 현안에 창의적 해법을 구하는 정책토론회
지식경영은 관련된 사안 내지는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최상의 결정을 내리는 경세전략입니다. 세종은 중요한 판단을 내리고 효과적인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 당시의 정보와 지식을 최대로 활용하였습니다.
세종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배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지식이 국왕의 조건이었던 시절, 그는 지독한 책벌레였습니다. 그는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경연(經筵)을 통해 신료들과 고전을 놓고 함께 공부하면서 토론하였습니다.
집현전(集賢殿)을 세운 그는 37년간 100명 이상의 인재를 배출했고, 이들은 사실상 조선 전기의 학문과 정치를 이끌어가는 주역이었습니다. 세종은 과제를 학사들에게 던져놓고 비판과 자문을 기다리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학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종의 말이라도 무조건 따르지 않았습니다. 창덕궁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겠다고 고집하는 세종에게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申錫祖)는 이 나라는 조종(祖宗)의 국가이지 전하의 사유는 아니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세종은 유교 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실용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재위 12년 태종의 능 옆길을 풍수지리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풍수학을 경연에서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성리학 경전은 물론이고, 역사와 과학, 음악 서적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를 두루 섭렵한 학자 군주였습니다.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카리스마 형
세종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기억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태종은 힘과 권력으로 의견이 다른 상대를 제거하고 물리쳐 나갔지만, 세종은 힘과 권력보다는 함께 의논하고 토론하며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세종의 회의 방식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문제를 던지고 신하들의 토론을 경청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세종은 토론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찬반의 논지가 분명하면 계책을 각각 진술하게 합니다. 회의 시간은 길지만 문제는 명확해집니다. 황희가 최종적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이면 세종은 짧게 “황희 말대로 해라”하며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믿고 맡기는 스타일입니다.
여진족 토벌 문제를 두고 토벌여부와 토벌시기, 토벌방법과 명에 보고 여부를 의논합니다. 최윤덕(崔潤德))이 토벌을 반대하자 세종은 몇 차례 그를 설득합니다. 최윤덕은 마음을 바꾸어 4~5월경 압록강에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 행군하겠다고 말합니다.
세종은 “경의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처음부터 그에게 찬성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허조(許稠)는 끝까지 문제점과 최악의 경우를 들어 반대합니다. 세종은 그런 허조를 배제하지 않고 계속 회의를 참석시킵니다. 허조의 반대는 토론에서 집단적 사고(事故)를 방지하는데 기여합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 불만이 있어도 늘 끝까지 경청했고 제기된 문제점을 해결한 뒤에야 그 정책을 시행합니다. 결국 세종은 여진족이 병 치료차 한 달간 온천에 가 있어 경계를 풀었을 때, 대규모 토벌을 감행하여 크게 무찌르게 됩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사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리고 며칠씩 그 내용을 직접 읽고 채택하였습니다.
능력 있는 인재야말로 나라의 근본
세종의 인재관은 조조(曹操)의 인재관과 같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에서 조조는 인물 보는 눈이 정확하여 그의 시선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분이 낮거나 과거의 비행이 있더라도 재능이 있으면 발탁하여 맞게 잘 썼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세종 시대 황희(黃喜)는 영의정으로 20년 이상 임금을 보필합니다. 황희는 세종이 임금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인물로 출신 성분도 서얼(庶孼) 신분이었습니다. 또한 젊었을 때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청백리하고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황희는 사사로운 청탁과 불법 개입, 문제 있는 사생활로 파직을 당했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공적을 이룰 때까지 보호하였으며,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그를 다시 중용했고, 그는 대업을 보필하며 간악한 소인배에서 청백리 황희 정승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오늘날 존경받는 공직자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황희는 온건한 조정 능력을 지녔으며, 핵심을 파악하고 일의 순서와 책임자를 간결하게 정리하는 등 일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탁월한 인재 발굴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직한 허조, 무식하나 최선을 다하는 최윤덕, 천출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을 천거한 것도 바로 황희입니다. 그는 인재가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수치라고 생각하여 능력 있는 자라면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발탁했습니다.
특히 세종은 영의정(領議政)의 자격과 능력으로 ‘일’뿐 아니라 ‘말’도 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일심봉공(一心奉公)의 자세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하는 일이 백성과 임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하고 설득하는 능력입니다. 정치는 모름지기 집행 못지않게 소통(疏通)하는 일입니다.
세종 시대의 인물은 성격은 물론 사상에서도 다양합니다. 세종은 가능한 이질적인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등용합니다. 허조가 원칙을 강조하는 법가(法家)적 인물이라면, 황희는 섬세한 저울추처럼 국왕과 신료, 신구세대 간의 대립 속에서 중용을 실천한 유가(儒家)적 인물에 가깝습니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불었다는 맹사성(孟思誠)은 도가(道家)적 인물이었고, 변계량(卞季良)은 불교에 심취한 인물입니다. 세종은 이들의 말을 수용하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였습니다.
세종의 민본주의 실천과 창조정신-한글창제
세종은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의 계몽주의 철학자보다 더 일찍 민본주의(民本主義) 본질을 말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언어 창제의 문제가 아닌 “과연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여야 하나?”라는 백성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법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두려워서 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한문 때문에 백성들이 억울함을 겪고 있는 현실을 해결하고자 한글을 창제한 것입니다. 정창손(鄭昌孫)은 “담당 관리만 잘 임명하면 억울할 일이 없다.”며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했지만, 세종은 반대한 이들 중 유독 정창손만은 파직시켰습니다. 이는 선비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일깨워 준 상징적 조치였습니다.
세종과 최만리(崔萬理)의 논쟁은 전형적인 중화(中華) 문명주의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최만리는 상소에서 문명의 중심은 명나라에 있으며 그 표준에서 멀어지는 것은 야만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조선왕조가 명나라를 극진 사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명나라와 다른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핵무기 확산금지 조약(NPT)을 탈퇴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최만리의 말에서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언어학적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네가 운서(韻書,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편찬한 책)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가 몇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훈민정음은 실용적인 언어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득합니다. “이 언문(諺文)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라는 말로 훈민정음 창제의 당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17년의 토론결과와 세법개정
세종의 개혁방식은 공법(貢法-세를 매기는 법)을 제정 시행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세종은 무려 17년간(1427~1444)의 긴 토론을 거치는 3단계 과정을 통해 반대자들까지도 그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법을 시행했습니다.
1단계는 고위관료에서 농민까지 17만 명을 대상으로 찬반여론을 실시합니다. 2단계는 이와 같은 여론조사를 놓고 지도층인 전국의 사대부(士大夫)로 하여금 그 찬반 이유를 보고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 현직 고위관료들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격렬한 토론을 거쳐 최종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거칩니다.
백성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오늘날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숙의(熟議) 과정 덕분에 개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조차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권이 바뀌면 늘 ‘개혁’을 말합니다.
하지만 개혁이 실현되기 위해선 국가 경영상의 문제를 먼저 국민에게 공개하고, 여론을 경청한 후, 직접 이해당사자 간의 토론을 거쳐야 합니다. 반대자에게는 그 이유를 듣고, 법 안에 반영하거나 충분히 설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세종은 진보적인 선각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절엔 여자 노비뿐만 아니라 남자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도 궁중 악사로 채용하였습니다. 엄연한 신분사회에서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나 생각해 봅니다.
세종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말한 존 로크(1632~1704)보다 무려 200년 앞선 사람입니다. 세종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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