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4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명의 핵심에는 늘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신교 전통의 그리스 로마 세계가 어떻게 유일신 전통의 기독교로 바뀌었는지를 아는 것은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에 관하여 참고한 책은 김덕수의 《바울》과 차동엽 신부의 《맥으로 읽는 성경 3권》,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입니다.
《바울》(Paulus)은 생전에 예수와 직접 접촉한 적은 없으나 생전에 서양의 문명사적 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예수의 가르침을 보편적인 종교로 세계화한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의 형성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태·마가·누가·요한 4대 복음서 보다 앞서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의 존재했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바울》은 단순한 종교적 인물 이상으로 헬레니즘 세계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며, 복음 전도에 활용했을 정도로 헬라어에 능숙하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에피쿠로스(Epicurus) 학파와 금욕적인 스토아 철학(Stoicism)에도 정통하며,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수사학(修辭學)에도 식견 있는 인물로 평가합니다.
아울러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당대 석학으로 유대교 율법학자 가말리엘(Gamaliel)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사울인가? 바울인가?
《바울(Paul)》의 원래 이름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과 같은 이름 사울(Saul)이었고, 그 왕과 같이 베냐민 부족 출신입니다. 사울이 처음으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안티오키아(안디옥)교회에서 첫 번째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사울의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권자인 그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전략적으로 개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극단적 민족주의자이며 크리스트교의 박해자에서 회심(回心) 한 뒤 초기에 유대인 정체성을 강조하던 시기에는 사울로 지칭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 로마인, 로마화한 유대인을 상대로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복음을 전파하면서 라틴어 이름 파울루스(Paulus)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개신교는 ‘바울’, 천주교는 ‘바오르’, 개신교와 천주교의 1977년 공동 번역성서에는 ‘바울로’ 하였습니다.
속주출신 로마시민
《바울》은 정확한 생몰(生沒) 시기는 알 수 없으나 AD 5년 전후에서 AD 64~67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회교국가인 터키 동남부 해안가의 중심도시 타르소스(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시리아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와 로마로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한 경제적 번영지입니다. 기원 전 2000년경에 이미 튼튼한 요새가 둘러진 성채(城砦) 도시가 생겨났으며, 기원전 1세기 중반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 특별합니다. 《바울》 집안이 어떻게 시민권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 이전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의 직업이 천막 만드는 일로 미루어 보아 직계 조상 중에 로마를 위하여 군납업을 하면서 그 대가로 시민권을 하사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시민은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면 로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선교 중 어려움에 처할 때,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내세워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 바리새인
《바울》은 스스로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인 사도(使徒)들이나 복음에 반대하는 유대인에게도 자신은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 바리새인이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면서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천사와 씨름으로 이기고 나서 받은 이름이며,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바울》의 열 두 아들 중 네 번째 아들 유다에서 기원했습니다. 유대인은 유다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열두 부족 중에서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그 부족 중 다윗 왕과 그 아들 솔로몬 때 이스라엘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 후,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유다 왕국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습니다. 예수 역시 혈통적으로 유다의 후손입니다.
나라를 잃고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다 사회는 율법주의 바리새파, 성전 제사와 기득권주의 중심의 사두개파, 세속에서 물러나 경건과 금욕주의 에세네파, 무력투쟁 혁명주의 열심(熱心)당 등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바울》은 바리새파로 로마로부터 독립을 표방하면서 모세의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만 경배해야 한다는 유일신(唯一神)사상, 창조주 하느님이 자기 민족만 특별히 선택했다는 선민(選民)사상, 언젠가는 메시아(Messiah)가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
예수의 3년간 공(公)생활에서의 가르침, 십자가 고난, 부활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보면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제자들조차 처음부터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묻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고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가 승천 이후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오순절(五旬節)에 성령이 강림 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과연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예수는 카이사스의 양자로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전 로마의 인구조사를 명령한 호적령(戶籍令)에 따라 자기가 살던 갈릴리 근처에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 30여년의 사적인 생애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고,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을 도우며 평범하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지막 3년 동안 제자들을 모아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도 일으키고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까지는 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Christ 구세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하며,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復活)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전쟁 영웅 같은 그리스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와 싸워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는 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만약 그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면 예수는 당장 유대인들에 의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쳐야할 내용이 남아있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반역한 노예를 처형할 때 사용하는 형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을 좌절과 실망으로 몰고 갔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서 제자인 자신들의 나약함, 비겁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며 슬픔 속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여 예수운동이 시작되다
부활 사흘 만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며 부활한 지 40일 만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승천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 성령(聖靈)이 강림하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른바 ‘예수 운동’이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가 유월절(逾越節)에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다가 승천하였으며, 승천한 지 대략 열흘 뒤 오순절에 성령(聖靈)이 강림(降臨)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의 탄생 못지않게 그리스도 역사의 새 전환점입니다.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의 태도는 급변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으며, 그는 회개하고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믿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힘입어 그날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보고 5,000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유대교를 초월한 새롭고 독자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모든 물건을 나누어 썼고, 재산권을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집이나 밭을 팔아 사도(使徒)들 앞에 두면 사도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출신 헬라 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출신 히브리 파 유대인 사이에 성전(聖殿)문제나 식량문제 등등 갈등도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대인중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헬라 파 유대인을 대표하는 일곱 집사(執事) 제도를 만들어서 양측 간에 협력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율법인가? 예수인가? 바울의 회심
헬라 파 유대인으로 비교적 자유인이라는 전통을 가진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과격한 《스데반(스테파노)》은 성전 예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유대인과의 논쟁을 벌였고, 《예수》를 잡아 죽이는데 동조한 무리를 비판하고, 《예수》가 의인(義人)이었다고 증언하다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공회(公會)에 고소당했습니다.
즉시 긴급재판이 열렸고, 증인들은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부정했다고 증언했지만 《스데반》은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군중은 《스데반》을 에워싸고 돌로 쳐 죽이기 위해서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갔고, 그는 결국 돌에 맞아 순교(殉敎)합니다.
이 순교의 현장에서 돌을 치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이 《바울》이었고, 《바울》은 《스데반》의 돌 세례 처형을 마땅한 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당시 예수 운동에 결사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 운동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신자들은 군중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도망치고, 그들은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사울》은 조상들의 전통에 열심이며,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종교적 성실성과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사울은 도대체 왜 박해에 앞장섰을까? 하나는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율법을 망쳐 놓았다고 인식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자기들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심판 때 부활한다고 믿고 있는데 예수가 미리 부활했다는 사실을 이단(異端)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북쪽으로 260Km 떨어진 다마스코스까지 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다마스코스에 거의 이르렀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예수》와의 극적인 만남을 경험합니다. 번개 같은 ‘섬광’에 맞아 말에서 떨어집니다. 이것이 크리스트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짧지만 강렬했던 《바울》과 《예수》의 만남이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진 《바울》은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다마스코스로 들어갔으나 먹지도 보지도 못하고 사흘을 보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다마스코스에 있던 제자 《하나니아스》의 환상 속에 《예수》가 나타나 《바울》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바울》을, 더군다나 다마스코스까지 그런 일을 하려고 온 사람을 어떻게 가서 축복하느냐고 《예수》께 물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라고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니아스》가 《바울》을 만나 기도하니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고 바울은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닫고,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었던 일이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을 박해하는 일이었음을 인식하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깨달음이 그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놓습니다. 《바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울》은 선교 일꾼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정통 바리사이파로 유대인을 만나면 상대할 수 있고, 그리스 문화권에 살아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헬레니즘(Hellenism)에 정통하고, 유럽의 패권국인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를 일으키다
《바울》은 옳다고 믿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실천하는 행동가였습니다. 예리한 지성을 소유하였으며 달변가였던 그는 지체하지 않고 선교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삶의 목표를 전환하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다마스코스에 있는 제자들은 물론이고 반대하던 유대인들도 혼란에 빠졌습니다. 마치 연합군이 반군에 가담한 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바울의 회심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예수복음 자체를 반대한 유대인들의 배신자로 낙인찍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신변 보장이 되지 않자 아라비아로 피신하고 약 3년간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깊이 체득하고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뒤,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초기 교회 공동체로부터 경계를 받았지만 이스라엘 밖의 유대인 《바르나바(Barnabas)》의 중재로 받아들여집니다. 이후 《바울》은 고향 다소(Tarsus)로 돌아가 10년 동안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보냅니다.
한편 《스데반》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신자들이 안티오키아로 피해 들어왔고, 이방인인 헬라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자 안티오키아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하여 이 교회를 이끌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바울》의 후원자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 헬라어(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서 초기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밭을 팔아 내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선교에 대한 《바울》의 열정과 그가 훌륭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직접 다소로 가서 《바울》을 모셔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는 유대인을 선교하고, 《바울》은 이방인 선교라는 역할 분담과 타협이 이루어졌고, 예루살렘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는 서로 돕는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성전(聖典)이나 회당(會黨)이 유대교 신앙의 중심이자 상징인 건물이었다면, 교회(敎會)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함께 모인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제1차 선교여행하다
AD 46~48년경 제1차 선교여행은 《예수》께서 주신 복음 전파의 명령(마가복음 16:15)에 따라 소아시아의 동부지역으로 확산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곳 안티오키아(안디옥) 교회에서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선교여행의 지도자는 《바르나바》이었으며, 《바울》은 부(副)지도자였고, 《마가(Mark)》와 《디도(Titus)》도 동행하였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출발하여 키프로스 섬과 지중해 동부지역 소아시아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울》의 복음운동은 ‘철저한 메시아 종말론’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고난을 받지만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완성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재림 신앙이 핵심 내용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쳤느냐보다는 그분이 누구이며, 왜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했는가에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와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의 복음 운동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전달하면서 초기 교회를 세우고, 모든 민족·성별·신분·지식 유무에 관계없이 차별하지 않고 배타적 신앙에서 모두를 사랑하는 진정한 복음의 보편성을 실천합니다.
《바울》과 일행은 안티오키아를 떠나 첫 번째 선교지인 《바르나바》의 고향,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유대인의 여러 회당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때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의 곁에는 마술사 엘루마가 있었고, 그는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고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책동했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 마술사를 꾸짖고 저주하자,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기적이 일어나며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총독은 큰 감명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바울》은 사역(使役)의 주도적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경에는 히브리식(고대 이스라엘 민족) 이름 ‘사울’ 대신 헬라식(그리스식) 이름 ‘바울(Paul)’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 《신약성경》에서는 줄곧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음식 규칙이나 제도가 까다로웠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들과의 식탁 교제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유대인의 율법 준수나 할례(割禮) 등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죄의 늪에 빠지게 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트로이아에서 피리피, 아테네까지
제2차 선교여행은 《바울》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 후반에서 18장 초반까지 기록되었는데 이때가 AD 49~52년이었습니다.
1차 선교 여행과는 달리 《바르나바》와는 《마가》의 동행여부를 두고 이견으로 함께 하지 않았고, 《실라(Silas)》와 출발하였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때 도중에 떠난 《마가》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바르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1차 선교 여행 때처럼 키프로스로 갔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해상이 아닌 육상으로 시리아를 거쳐 자신의 고향인 지금의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킬리키야(Cilicia)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바울》은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이방인 출신 청년 《디모데(Timothy)》가 예수복음을 받아 들였고 최상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방인을 선교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도 좋은 모델로 선교활동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때 논란이 된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割禮)를 하게하여 합류시킨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총회 결정에서 헬라인 출신은 굳이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유대인 그리스도의 반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의 당초 계획은 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각각의 성으로 가는 것이었으나 ‘마케도니아 환상Macedonian vision)’ 이라는 경험을 한 후 선교여행에 변화를 주게 됩니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남쪽으로 십여Km 떨어진 트로이아(Troia)라는 항구에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며 이르되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으로 복음이 유럽으로 처음 전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트로이아는 유럽 선교의 출발지로 이 여행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장》의 저자인 안티오키아 출신 헬라인 《누가(Luke)》가 합류합니다. 이 사람도 《바울》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들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동행했으며, 선교 활동 전체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초기 크리스트교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누가》가 합류하여 유대인이자 바리새파인 《바울》을 선교팀장으로 하고,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디모네》와 이방인 출신 《누가》가 한 팀으로 구성하여 예수 복음은 유럽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첫 선교지 빌립보에서는 유대인이 적어 회당도 없었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 식민지로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법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여기서 자주색 옷감장사를 하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 《루디아(Lydia)》를 만났고, 그 가족까지 《바울》의 설교로 주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루디아》 집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바울》 일행이 지나다가 《바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큼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있는 점을 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는데 이 여자는 선교 활동에는 방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참다못해 여종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바울》에게서 생겼습니다. 그 여자는 정상인이 되었지만, 그동안 여종이 점을 쳐서 받은 주인의 이익이 없어져 분노한 그들이 《바울》과 동역자 《실라》를 광장으로 끌고 관원들 앞에 데려갔고, 그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밤중에 두 사람은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은 사슬이 벗겨졌으며, 자다가 놀란 간수(看守)는 죄인들이 모두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여 책임 추궁이 두려워 칼로 자살하려했는데, 도망치지 않고 자리에 남아있던 《바울》이 만류하였습니다. 간수는 고마운 나머지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와 그 온 집안은 복음을 듣고 구원 받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로마 지배 하에 있었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여전한 명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첫인상은 우상의 도시로 한마디로 “격분했다”는 표현이 적확합니다. 그는 이 지역의 지적 분위기에 맞게 직접적인 복음보다 이론적으로 따져 크리스트교 신앙을 소개하였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을 만나서 토론을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을 이방(異方)의 신을 전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세계와 다른 부활이나 메시아와 같은 이질적인 《바울》의 신학 논리가 처음으로 부딪친 때이며, 범신론(汎神論)의 세계와 일신론(一神論)의 세계, 그리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격돌한 순간입니다.
그는 다신교 전통의 헬라문학에 익숙한 철학자나 지식인에게 유일신 사상의 토대 위에서 다신교의 허점을 비판하였습니다. 일부는《바울》에 대하여 호기심을 보였고 판테온(Pantheon)신전에 가까운 아레오파고스로 데려가《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청중은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로 들어온 경건한 이방인이었지만 이곳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신전(神殿)이나 신상(神像)이 많은 것이 아테네 시민들이 종교성이 많다는 뜻으로 서두를 꺼내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 제단 이야기를 꺼내 크리스트교의 하느님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최후의 심판이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철학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이었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 후에 바울은 고린도(Corinth)로 향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입구에 있는 항구도시 고린도는 AD 49년, 《바울》이 방문했을 때 교통의 요지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나 빈부의 격차가 심했고, 지중해 곳곳에서 드나드는 상인이나 선원에게는 향락의 도시라는 오명도 있었습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1,000명의 여사제가 선원이나 상인을 상대로 합법적인 매춘행위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1년 6개월이나 머물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반발하였고, 율법을 어기면서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라고 권했다며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당시 갈리오(Gallio) 로마 총독은 재판 자체를 거부하고, 유대인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갈리오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분파로 간주하면서 유대교 내부의 해석 차이로 판단하여 법정에서 다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법 아래 보호받는 유대교의 하나로 여긴다는 신호가 되었으며, 이후 일정기간 동안 로마 정부의 직접적인 박해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에서 목회로-3차 선교 여행
제2차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바울》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고 AD 53년에 제3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제2차 선교 여행 때 복음을 받아들인 지역의 교회를 돌아보고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아시아 항구도시 에베소스(Ephesus)는 수륙 교통의 요지로 경제적 번영에 유리한 환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국제도시입니다. 예수복음이 전파되기 전, 에페소스는 풍요·출산·생명력을 상징하는 지모신(地母神) 숭배와 마술(魔術)의 성행으로 이교(異敎) 문화가 번성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스에서 2년 3개월을 머물며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자, 마술사들이 회개하여 주문서들을 불태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쳤으나 다신교적 전통에 익숙한 지모신(地母神) 아르테미스 숭배자들이 반대하자, 《바울》은 티라노스(Tyrannus) 서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이후 선교활동에 동참할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 라며 신상(神像)에 대한 숭배를 비판하자,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신상 관련 장인(匠人)들이 반발하고 나섰으며, 특히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 테메트리오(Demetrius)라는 은(銀) 세공업자가 주동이 되어 은 세공 직공과 영업하는 사람들을 선동해 대규모 소동과 폭동을 일으켜 《바울》 일행을 위협했습니다.
테메트리오 사건 소요는 그쳤지만 《바울》은 제자들과 이별하고, AD 56년 여름에 에베소스를 떠나 마케토니아(Macedonia)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베뢰아 교회들을 격려하며 사역을 이어갔고, 이후 고린도로 내려가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로마서)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 말기에 고린도에 3개월 머무르며 《로마서》를 집필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로마와 해상 교역로로 연결된 요충지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신학적으로 깊이 있고 논리적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루터(Martin Luther)는 《신약성경》 중 《로마서》를 진정한 보화(寶貨)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 복음 확산의 전략적 거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직접 로마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회심한 유대인과 흩어진 유대인 출신들이 세운 다문화적 교회이기 때문에 자신의 복음 이해를 설명하고 신뢰를 쌓고자 했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로마 교회를 스페인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은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존재이며,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용서받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행-마지막 선교활동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 최초의 교회이자 사도들이 머물던 교회로 마치 어머니 교회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특히 로마, 고린도, 마케도니아 등 이방 지역의 그리스도 교인에게는 영적(靈的) 권위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고난을 당하자, 고린도 교회와 마케도니아 교회 등 이방 교회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적으로 돕자고 권했고, 이 교회들은 사랑으로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 교회의 연대(連帶)를 중요시하였습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서로 돕는 공동체로 출발하였고, 예수 신봉자는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며 가족인 만큼 서로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유대인의 큰 절기 오순절(五旬節)이 오기 전에 급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호기로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반대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의 전통을 무시하며 율법을 폐지하자고 하고, 유대인의 자녀에게도 할례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율법만으로는 하느님의 의로운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쳤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바울》은 유대인에게 고소당했고, 로마군에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근거로 법적인 절차에 따라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으며 자신을 심문하는 총독과 유대지역의 분봉왕(分封王)앞에서조차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메시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도록 더욱더 내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를 위해 약하고, 모욕당하고, 어려움에 처하고, 박해당하고, 재난을 겪을 때 기뻐합니다. 알다시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왔지만, 2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자택 연금 중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교회로 돌려보내며 각 교회의 처지에 맞게 신앙적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에 관하여 편지로 적어 보냈습니다.
이후 일시적으로 석방되었으나 네로 황제(AD 54년~AD 68년)치하에서 다시 체포되어 극심한 수감생활을 하였습니다. AD 64년에서 67년경 바티칸 언덕 근처에서 참수(斬首)형으로 순교했으며, 그 자리에는 오늘날 성 바오르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디모네 후서》 4장 7절 “하느님을 믿는 삶을 열심히 살아왔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며,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켰다.”라는 성서의 말씀처럼 《바울》은 박해 속에서도 상황을 초월한 내적 담대함과 흔들리지 않은 믿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처형자의 칼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찾아다니는 사목(司牧)을 하였습니다. 세 번의 선교여행을 하였고, 고생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옥살이, 수많은 매질, 죽을 고비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디를 가든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공부시킨 후 세례를 주고, 직책을 세워놓고, 안심이 될 때야 비로소 그곳을 떠났습니다.《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로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혀 달려간 선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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