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정관정요(貞觀政要)》는 책의 두께만으로도 독자를 압도합니다. 그렇지만, 진작 “읽었어야 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크든 작든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마음에 새기기만 해도 훨씬 더 깊고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끌 수 있으리라고 상상합니다.
《정관정요》는 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던 당(唐)나라, 그중에서도 가장 안정되고 찬란한 시기였던 당 태종 정관(貞觀) 시대의 실제 정치 운영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관 오긍(吳兢)이 당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전횡을 지켜보며 “후대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교육적 목적을 담아 황제에게 올린 책입니다.
《정관정요》를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무엇이 당태종을 성군(聖君)으로 만들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풀숲을 헤치듯 한 구절 한 구절을 살폈습니다. 창업자인 고조 이연(高祖 李淵)이 수(隨)나라에 반기를 들고 당(唐)을 세울 때, 당 태종은 고조 곁에서 실질적 중심 역할을 했으며,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의 태종처럼 형제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집권 후, 그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나라를 어떻게 이끌었는지, 권력의 힘과 통치의 책임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았는지 《정관정요》는 충실하게 보여줍니다.
애민
첫째, 당 태종은 무엇보다 백성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흔히 말하는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말처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 속에 그의 통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당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주의 도리는 반드시 백성을 아끼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백성의 일을 보살피는 데 있다. 만약 백성을 괴롭히면서 자신의 몸을 보존하려 한다면, 이는 넓적다리를 잘라 배를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면 배는 부를지언정 자신은 쓰러진다.”
그가 백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집권 2년, 수도 장안(長安) 부근에 큰 가뭄이 들고 해충인 ‘누리(메뚜기 떼)’가 들끓었으며, 이 때문에 곡식이 거의 사라질 위기였습니다. 그때 당 태종은 직접 누리 몇 마리를 손으로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곡식으로 목숨을 이어간다. 이 벌레들은 백성의 생명을 해치는 해충이다. 그 책임은 내게 있다. 백성들의 곡식을 해치지 말고, 나의 심장을 갉아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태종은 그 누리들을 삼키려 했습니다. 신하들이 “병이 나십니다.” 라며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지만 태종은 되레 물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재앙을 나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병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는 끝내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누리를 삼켰습니다.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던 통치자가 있었기에 당나라는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고, 태종은 역사상 드물게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민심
둘째로, 당태종은 정성을 다한 정치, 기본에 충실한 정치를 상책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통치 철학은 ‘백성을 근본으로 여긴다.’는 민본주의(民本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백성이 좋아하는 일을 우선 시행하고, 억지 명령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교화(敎化)를 추구했습니다. 이는 힘으로 억누르는 통치가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 다스린다.”는 노자(老子)의 무위지치(無爲之治)와 닮아 있습니다.
태종은 “하천이 맑고 흐림은 수원(水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주는 정치의 근원(根源)이고, 백성은 그 물줄기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면 국가의 흐름 또한 곧고 맑게 흐른다는 뜻입니다.
신하 위징(魏徵)은 이에 화답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께서 품행을 바르게 하시는데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군주가 바르고 신하가 바로 섰는데, 누가 감히 허튼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관정요》가 보여주는 태종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해 군주의 부족함을 메우고, 충신들의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아꼈고, 형벌을 가볍고 신중하게 써서 백성에게 두려움보다 신뢰를 쌓았습니다. 또한 풍속을 바로잡고 문화를 중시하여 사회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또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농사철에 군역과 부역을 부과하지 않게 했으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를 거울삼아 일관되게 선행(善行)을 이어가도록 했고, 사치와 낭비를 멀리하며 근면과 검소의 본(本)을 보였습니다.
군주가 이러하니 관리와 백성들도 저절로 청렴하고 근신하게 되었으며, 왕실이나 종친, 권문세가와 외척 역시 지나친 권세를 부리지 못했고, 나중에는 감옥이 텅 비는 시절까지 나타났습니다.
위징은 태종에게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백성의 원망(怨望)은 일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을 때 생깁니다. 썩은 새끼줄로 수레를 끄는 것이 금방 끊어지듯 위험 하듯 군주는 매사에 신중해야 합니다.”
위징은 또한 수나라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도 30여 년 만에 무너진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군주의 사치와 방종, 민심 이반입니다.
백성을 억누르며 모든 일을 군주의 욕망대로 처리하고, 재물을 탕진해 향락을 추구하고, 천하의 미녀와 보물을 모으며, 궁궐만 화려하게 꾸미고, 부역과 세금을 끝없이 부과하고, 전쟁을 자주 일으켜 백성을 지치게 하고, 충신이 홀대받고 아첨꾼이 상을 받던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는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이미 썩어 있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청
셋째로, 당태종은 신하의 간언(諫言)을 진심으로 경청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집권 초, 신하들이 자신의 뜻에 무조건 영합하는 태도를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황제가 내린 조서라 하더라도 부당한 점이 있다면 반드시 의견을 내어 바로잡으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했습니다.
“바른 말을 솔직하게 말하라. 나라를 위하는 간언이라면 내 뜻에 거슬린다하여 벌주거나 꾸짖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폐하께서 대신들과 논의할 때, 폐하의 뜻과 맞지 않는 의견을 말하면 때때로 그 자리에서 꾸짖음을 받았고, 신하들은 두려워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정한 간언은 어렵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깊이 반성했습니다.
“내가 그리한 것을 후회한다. 그대의 말이 지당하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고치겠다.”
이 한마디는 태종의 그릇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태종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위징(魏徵)입니다. 위징의 간언은 언제나 직설적이고, 때로는 군주의 감정에 상처를 줄 만큼 날카로운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군주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충언’이었지만, 태종은 그런 위징을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존중했습니다.
태종은 간언을 들은 뒤 종종 화를 내기도 했지만, 금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위징을 불러 의견을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위징뿐 아니라 누구든지 좋은 건의를 올리면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공을 크게 포상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위징이 본래 태종의 정적(政敵)이었던 태자 이 건성(태종의 형)의 참모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때 태자에게 “이세민(훗날 태종)을 제거해야 한다.”고 까지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태종은 그의 능력과 그릇을 알아보아 사간원 대신에 해당하는 간의대부로 중용했습니다.
위징은 태종의 정치적 나침반이었고, 어떤 사안이든 위징의 관점을 빌려 판단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위징이 죽은 후에 일어난 고구려와의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사실상 패배 후 물러나면서,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는 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위징의 부재를 아쉬워했습니다.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비석을 직접 다듬으며 “나의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군주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을 잃었다는 이 말은, 위징과 태종이 만들어낸 《정관정요》의 정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재
넷째로, 당태종은 어진 신하와 현명한 인재를 가까이 두는 일을 통치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천 장의 양가죽도 여우 겨드랑이의 털 한 올만 못하다”는 말처럼, 한 명의 뛰어난 인재는 천 명의 평범한 사람을 대신합니다. 중국의 조조가 천하의 인재를 얻기 위해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던 것처럼, 인재를 얻는 일은 군주에게 있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태종의 곁에는 그가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신뢰하던 여덟 명의 핵심 참모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났다는 기쁨으로 전심전력 충성했고, 군주가 근심하면 그것을 자신의 치욕으로 여겼으며, 군주가 모욕을 당하면 자신들이 목숨으로 그 치욕을 막겠다는 각오로 일했습니다.
전쟁에서 적군을 평정한 뒤 다른 나라 장수들은 금은보화를 챙길 때, 태종의 신하들은 적국의 우수한 인재를 먼저 찾아 태종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업무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처리 하겠다는 태도로 임했습니다.
평상시에도 신하들은 태종과 함께 옛 정치를 논평하며, 임금의 말과 판단 중 옳은 것은 기뻐했고,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나 판단을 들으면 안타까워하며 이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충신과 양신
어느 날 위징은 태종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언제나 바른 길을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바라건대, 전하께서 저를 충신(忠臣)이 아니라, 양신(良臣)으로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태종이 물었습니다.
“충신과 양신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자 위징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양신은 자신이 후세에 훌륭한 이름으로 추앙받고, 군주는 성군으로 칭송되며, 그 가문 또한 대대로 번영합니다. 그러나 충신은 그 자신과 일족이 몰살되기도 하고, 군주는 폭군이 되며, 나라와 가문이 모두 멸망한 후에 오직 “그가 충신이었다.”는 이름만이 후세에 남습니다.”
이 말은 마치 조선의 세종과 황희 정승, 백제의 의자왕과 계백 장군을 떠올리게 하는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충성의 결과가 군주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된다는 뜻입니다.
태종의 신하에 대한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태종은 이러한 위징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헌신하는 신하를 자기 몸보다 더 아꼈습니다. 실제 사례만 보더라도 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태종의 명장 이적(李勣)이 중병에 걸렸을 때 의사가 “구레나룻 수염으로 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자, 태종은 자신의 구레나룻을 직접 잘라 약을 지어 바쳤으며, 당나라 초기 최고의 문학·서예가 우세남(虞世南)이 죽었을 때는 황제가 일하는 정전(政殿)에 그를 기리는 제단을 직접 마련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위징(魏徵)에게 집이 없다는 말을 듣고 궁궐 건축을 중단하고 그에 쓰일 목재로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부하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정관정요》는 오늘날까지도 제왕의 통치 지침서로 손꼽히며 특별한 위상을 차지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어느 군주든 현명한 군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여겨졌습니다.
당나라 중·후기 선종(宣宗)은 이 책으로 병풍을 만들었고, 여진족 금나라 세종(世宗)은 아예 각본으로 편찬해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었습니다. 청나라 최고의 전성기 건륭제(乾隆帝) 역시 이 책에 감명받아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조선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세종(世宗)의 언행과 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세종은 《정관정요》를 수백 번도 더 읽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정관정요》를 기반으로 에도막부의 통치 기틀을 마련했다고 전합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왕조의 흥망을 경험한 수많은 군주들이 이 책에서 통치의 원리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통의 리더십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에도 당 태종의 정치는 제왕의 권위가 아니라 참모의 말을 기꺼이 듣는 열린 정치라는 점에서 여전히 본받을 만합니다. 조직의 크기와 시대가 달라져도, 리더의 겸손과 경청, 민본(民本)은 변하지 않는 통치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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