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1988년 이상구 박사의 엔도르핀(endorphin)이 면역력을 증대시킨다는 주장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본래 엔도르핀은 코르티솔(cortisol), 엔케팔린(enkephalin)과 함께 3대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엔케팔린은 신체 통각을 좌우하고 엔도르핀은 스트레스 상황에 빠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비하는 호르몬이다. 사실 내재성 통증 조절 성분의 호르몬을 모두 엔도르핀이라고 한다.
호르몬을 통한 내재성 통증 조절은 스스로 물질을 분비해 통증을 조절하는 것이다. 엔도르핀은 스스로 통증을 줄이기 위해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그 효과는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의 200배에 달한다는 말도 있다.
원리는 뇌 신경전달물질을 차단하여 고통을 줄인다. 구체적으로는 베타엔도르핀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엔도르핀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특히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을 하면 분비된다. 예컨대 웃으면 베타엔도르핀이 되는 것이므로 억지로 웃어도 효과가 있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노화를 막고 면역력을 증대시켜 암세포를 없애준다는 주장도 있었고, 베타엔도르핀을 암 환자의 척수에 투여한다는 말도 돌았다.
이런 의료상의 접근은 일반인에게 거리가 멀기에 웃음 치료 기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엔도르핀을 측정한다고 볼 수 없으나 하나의 관용어처럼 엔도르핀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이상구 박사의 주장은 호르몬의 중요성을 환기한 사례였다.
그런데 근래 호르몬과 관련한 용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단순히 건강을 넘어서서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에겐남(테토남)’ ‘테토녀(에겐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겐남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estrogen)을 분비하는 듯한 남성을 말한다.
그들은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부드럽고 유연한 특징을 갖는다. 쉽게 말하면 여성 같은 남성의 성향을 말하며 그것은 호르몬의 작용이 이뤄지는 듯한 맥락을 보인다.
테토녀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분비하는 듯한 여성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남성적인 특징을 보이는 여성을 일컫는 것이다. 예컨대 독립적, 주체적, 직선적이라고 한다.
여기에 ‘에겐테토’ ‘테토에겐’이라는 말도 쓰인다. 에겐테토는 테토인 줄 알았는데 에겐 호르몬 스타일이고, 테토에겐은 에겐인 줄 알았는데 테스토스테론 유형을 말한다.
남자다운 줄 알았는데 여성스럽거나 여자다운 줄 알았는데 남성스러운 성향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성향이 다를 수 있음을 말해준다. 어느 쪽이 좀 더 우선인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이러한 점은 MBTI처럼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결국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남녀 관계 연애 매칭을 위해 더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낯선 신조어는 아니다.
즉 에겐남·테토녀는 남녀 연애에 적용하도록 특화되어 있고, MBTI보다는 단순명확한 개념이고 쉽게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수시로 변할 수 있는 MBTI보다는 원칙 같아 보인다. 영어 약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 세대가 쓸 수 있을 듯싶다. 따라서 레거시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콘텐츠 분야에서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새삼 부각이 되고 있다. 이는 SNS와 OTT 콘텐츠의 인기와 확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특히 도파민(dopamine)은 ‘도파밍(dofarming)’이라는 신조어로까지 파생되었다.
도파밍은 도파민이 나올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보는 루틴을 말한다. 앞서 도파민은 기업과 교육계에서 주목받았다. 도파민이 성취에 따른 동기를 유발하는 호르몬이기 때문이다.
몰입의 플로우(flow) 원리를 호르몬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도파민이다. 목표를 달성하거나 문제를 풀면 그에 따라서 도파민이 분비되고 다시 새로운 동기부여가 생긴다.
특정 콘텐츠를 접하고 이해를 하면 흥미가 생기고 다시금 다음 장면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다음 회차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정주행, 빈지와칭(binge watching, 몰아 보기)으로 날을 새게 된다.
김국진의 ‘밤새우지 말라 말이야’라는 유행어는 호르몬의 작동 때문이므로 개인 의지로 해결되지 않았다. 숏폼(shortform)을 보기 시작하면 다음 콘텐츠로 빠져들기 쉽게 되고 알고리즘 추천은 이를 더 심화시킨다.
만약 이성적 조절이 되지 않는 이들이라면 어른·유아·청소년을 막론하고 제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새 도파밍 콘텐츠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세로토닌이 부각되었다.
세로토닌은 행복감을 주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는데 안정감·균형감·조절력을 보이는 호르몬이다. ‘세로토닝(serotonining)’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법하다.
이는 도파민을 뿜어내는 콘텐츠를 찾기보다는 평온한 상태를 찾으려는 것이다. 음악의 측면에서 보면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노래를 반복적으로 듣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드코어 장르물보다는 소프트한 콘텐츠를 선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자극적인 유튜브 콘텐츠 피로감을 호소하며 책에 주목하는 텍스트힙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호르몬과 관련한 신조어가 나오는 것은 Z 세대의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얼핏 과학적일 수 있지만, 그 개념들을 규정·적용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호르몬은 개별적이지 않고 원래 상호 연관되어 있다. 엔돌핀·코티졸·엔케팔린이 그러하며 도파민과 세로토닌도 상호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도파밍과 세로토닝 행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더구나 호르몬이 먼저인지 행위나 태도가 먼저인지 상대적이고 복합적이다. 호르몬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호르몬 관련 용어나 개념들 때문에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우선 사람이나 현상 그 자체를 보고 겪으며 판단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남성 호르몬만이 독립적·주체적·직선적인 성격을 보이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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